농업 의 역사를 좀 알려주세요.
[농업의 역사]
농업은 인간이 생활하는 데 꼭 필요한 식량의 생산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농업의 기원은 인간생활의 발전과정에서 찾아야 합니다.
돌을 도구로 사용했던 사람들이 살던 시대를 '석기시대'라고 합니다.
돌을 깨서 사용하던 그 시대에 농업도 시작되었습니다.
1. 구석기 시대
돌을 사용하던 석기시대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로 나뉩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산 속의 동굴에 살면서, 산에 있는 열매를 따먹거나 돌을 날카롭게 자르고
갈아서 가지고 다니면서 지나가는 동물을 잡아 먹었답니다.
그 당시는 과일이나 동물이 충분했기 때문에 먹을것을 일부러 찾아다니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충청남도 공주군 석장리,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 등지에서 구석기 시대에 사용되었던
유물들이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구석기인들이 살았다고 생각됩니다.
2. 신석기 시대
신석기시대는 약 만 년 전쯤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와 강이나 바닷가에 살면서
사냥을 했습니다. 구석기인들과 달리 신석기인들은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사냥을 해야 했습니다.
신석기인들은 들에서 조, 피 등을 채집하여 먹고, 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이 그릇은 모래땅에서 잘 설 수 있도록 끝이 뾰족한 모양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사람들은 채집해서 먹던 열매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농사를 짓게 된 것입니다. 이때가 기원전 약 6000년쯤입니다.
씨앗에서 열매가 나온다는 사실을 아는 데 약 4,000년이 걸렸습니다. 그 발견은 우리 인간의 문화발전에
엄청난 계기가 됩니다.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일은 큰 강을 끼고 있고, 농사 짓기에 적당한 기후인
적도 근처의 지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재배된 작물은 그 지역의 특성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인도에서는 벼, 중국에서는 조, 아프리카에서는
수수류, 중동지역에서는 밀 등이 재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원시 농업의 시작입니다.
사람들은 사냥을 해온 동물이나 새를 집에서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동물이라는 뜻에서
가축이라고 불렀습니다. 가축은 온순하고, 무엇이나 잘 먹고, 번식력(새끼를 많이 낳는 것)이 강하고,
사람에게 이용가치가 높은 것을 골랐습니다. 가축을 기르기 위해 풀을 찾아 떠돌아 다니기 시작했고,
이동생활을 하다가 잠시 머무는 곳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농사가 끝나고 더 이상 가축이 먹을 풀이
없으면 다른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중국에서 신석기인들이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조, 피, 수수, 기장 등을 재배하고 가축을
기르며 정착했습니다.
이때에는 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고, 그릇도 초기의 무늬 없는 것과는 다르게 그림을 넣어서 만들었는데
흙으로 만든 이 그릇을 '빗살무늬 토기'라고 합니다.
3. 청동기 시대
돌을 사용하던 시기가 지나고 중국에서 청동을 사용하는 문화가 들어왔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농업이 시작되는데 이 시기는 대략 기원전 1000년쯤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보리, 콩 등의 잡곡을 주로 재배하였는데, 여주나 부여 같은 곳에서는
벼를 재배하기도 했습니다 .
이렇게 해마다 농사를 짓고 수확물을 거두다 보니 부족과 그 부족을 대표하는 족장이 생겨났습니다.
4. 철기 시대
기원전 약 400년이 되자 중국 쪽에서 철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들어오고, 우리 나라 낙동강 하구에선
철이 생산되었습니다. 철제 농기구를 쓰자 농업은 더욱 발전했습니다.
철로 만든 무기로 힘이 강한 부족이 약한 부족을 공격해서 커다란 부족을 이루었는데
이를 부족국가라고 부릅니다.
이때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벼, 기장, 피, 보리, 콩 등의 오곡을 본격적으로 생산했습니다.
물을 가두는 저수지를 만들고 농업에 가축을 이용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5. 삼국시대
부족국가가 발달하자 왕을 중심으로 한 고대국가가 생겨났습니다.
한반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세 개의 국가가 탄생했습니다.
고구려는 서기 200년경 북쪽 산악지방에 생겨났는데, 원예 및 식량 작물을 재배했고
짐승으로 쟁기를 끌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철제 괭이와 쟁기로 보이는 철제 농기구도
발견되었습니다. 백제는 한강 근처를 중심으로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어 농사 짓기가 유리했습니다.
그 시대부터 벼를 주 작물로 재배하기 시작했고, 농사를 제일로 하는 농본국가의 틀을 갖추었습니다.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물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 수리시설을 확충했고, 600년경 신라에선 소
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습니다.
6. 고려시대
918년에 왕건이 고려를 세웠습니다.
이때부터 땅이 재산으로서 아주 중요시되는데 세금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고 농업생산을 늘리기 위해 농기구를 만들고, 종자를 나누어 주고,
논밭을 갈 소를 빌려 주기도 했습니다.
한편 인구가 계속 늘어나자 농사 지을 땅을 넓히기 위해 개간사업을 펼쳤습니다.
산기슭에 계단 모양으로 된 논을 본 적이 읽을 텐데, 이런 개간이 고려시대부터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재배방식을 2년 동안 세 번 재배하는 윤작법으로 바꿨습니다.
1년에 한 번 재배를 하면 2년동안 두 번밖에 지을 수 없는데 세 번이면 더 많은 수확물을 거두었을 겁니다.
또 계속 농사를 지은 땅의 수확량이 적어지자 심경법이 생겼습니다.
심경법은 땅을 깊이 파서 그 깊은 곳에 있는 영양이 풍부한 흙과 겉에 있던 흙을 바꾸어 주는 방법입니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벼농사가 상당히 보급되었고, 쌀을 저장하는 창고(의창)도 생겼습니다.
이때 이미 기존에 있던 벼와 오곡 그리고 오이, 가지, 파 등의 채소류가 재배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재료로 하는 요리도 생기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소, 돼지 등을 주로 길렀는데 교통수단으로 중요해진 말도 본격적으로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의생활을 바꾼 목화재배도 시작되었습니다.
문익점이 몽골에서 목화씨를 가져왔고 정천익이라는 사람이 재배에 성공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사실입니다.
그때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은 겨울에 따뜻한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7. 조선시대
1400년 초에 조선이 건국되었습니다.
고려가 농업을 권장하였다면, 조선은 농업을 나라의 핵심에 놓고 농업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땅의 넓이를 측정하고 중국에서 들어온 여러 가지 농업관련 기술서적을 번역해서 출판했습니다.
측우기는 비의 양을 측정해서 농사에 필요한 물의 양을 계산하는 기계입니다.
이런 과학적인 기계와 여러 가지 책들 덕택에 농업은 더욱더 발전했습니다.
따라서 종자가 개량되어 맛이 좋아지고 수확량이 많아졌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시비법, 파종개량법, 이앙법 등이 실시되었습니다.
시비법은 작물을 재배할 때 더 잘 자랄 수 있도록 양분을 공급해 주는 방법인데 지금처럼 비료가 없어
가축의 분비물을 이용했습니다. 냄새는 많이 나지만 작물에 필요한 영양분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파종개량법은 씨를 뿌릴 때 작물에 따라 다르게 뿌리는 겁니다.
조선 후기에는 더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우선 이앙법이 확대되고, 농기구가 크게 개량되고, 고구마, 감자 등이 들어옵니다.
가을에 추수한 쌀은 거의 떨어져 가고, 밭에 심은 보리는 아직 익지 않아 먹을 게 없던 시기를
보릿고개라고 했습니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심은 것이 구황작물인데, 일본에서 들어온 고구마와 중국의 청나라에서
들어온 감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상업작물인 담배, 인삼, 고추, 채소, 과실 등의 재배가 활발해졌습니다.
농경지가 넓어지면서 소의 중요성이 커졌고, 국가의 지배력이 강해지면서 서울에서 먼 시골까지
관리해야 했으므로 말도 아주 중요해졌습니다. 이러한 이유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축을 더 많이 길렀고, 과학도 발달했습니다.
8. 근 대
우리 나라를 강제로 점령한 일본은 부족한 식량을 우리 나라에서 보충하기 위하여 '미곡증산운동' 계획을
세우고 수리시설 확충, 품종 개량을 하여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는 등 강제수탈을 하였습니다.
1906년에는 경기도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설립했는데 이는 현재의 농촌진흥청입니다.
농업연구기관의 효시로 이때부터 농업에 화학비료와 농약이 쓰였고 일본산 제초기, 탈곡기 등
농기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과일도 들어와 재배되었습니다.
9. 현 대
1949년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우리 나라 전체 인구의 72%를 차지했습니다.
대다수의 국민이 농업에 종사했지만 해방 이후 급격한 인구 증가와 농업생산 부진으로 인한
식량 부족이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였습니다.
요즈음은 배고픔보다는 비만이 더 문제지만, 불과 이삼십 년 전만 해도 식량 부족 때문에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굶주린 배를 채워야 하는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주식인 쌀을 절약하기 위하여
보리와 콩 등의 잡곡을 섞어 밥을 짓는 혼식과 국수, 수제비 등의 분식을 장려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벼 품종 개량, 병충해 예방, 고효율 비료 등 농업 생산량을 높이기 위한 녹색혁명의 결과,
1977년에는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민 전체가 먹을 수 있도록 주곡인 쌀과 보리의 100% 자급을
달성했습니다.
1980년대 이후 농업인구가 급속히 줄어들고 사람의 노동력만으로는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됨에 따라
농기계 보급을 촉진하는 등 기계화 영농이 확산되었습니다. 또한 농기계로 영농이 가능하도록 경지를
정리하고, 농업용 용수를 개발하는 등 농업부문의 생산 기반도 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작물의 온도, 습도 등 성장 환경을 자동 조절하는 유리 온실에서는 계절에 관계없이 과일이나
채소가 생산되고, 자동 설비를 갖춘 대규모 농장이 생기는 등 현대적 시설과 첨단 장비를 갖춘
농업으로 발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