젯상에 숙주나물 을 쓰지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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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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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상에는 숙주나물이 쓰입니다. 제사상에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 어르신 분들이 쉽게 쉬어버린다고 - 마치 '신숙주'와 같다고 - 싫어하시지요. 그리고, 숙주나물이라는 이름이 '신숙주'의 변절에 비겨서 따온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 주장(속설) 속설에는 숙주나물의 숙주는 신숙주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그는 육신을 등지고 세조의 공신이 되었으며, 죄없는 남이장군을 죽이고 공신의 호를 받은 사람인즉, 서울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신숙주의 변절을 숙주나물의 변패에 비겨 숙주라하였다. ..........<만기요람> ----------------------------------- 주장(속설)에 대한 반론 "숙주나물이 신숙주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것은 하나의 가설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변절을 자주해서 그런거 아닙니다. 신숙주는 조선 세조때 사람으로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을때 세조가 중용한 학자중의 한 사람입니다. 신숙주는 박팽년, 이개, 성삼문 등과 세종대왕에게 집현전 학자로 발탁되어 처음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데요, 신숙주가 책벌레라서 매일 밤 집현적 학자들의 당번을 대신 서주며 밤 새서 책을 읽었다는 고사는 대단히 유명합니다. 이 얘기가 세종대왕 귀에도 들어가서 세종대왕이 첫 닭이 울고서야 잠든 그에게 가죽옷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왕조실록에 남아있습니다. 신숙주는 세조와 함께 중국 명나라로 몇차레 사신으로 다녀온 인연이 있습니다. 그 때 세조와 친해져서 세조가 반정을 일으켰을때 마음대로 반대할 수 없었겠죠. 그래서 후에 사육신의 난(단종을 다시 왕으로 복귀시키려는 반란)이 일어났을때 가담하지 않아 동료 사육신들에게 무지하게 욕을 먹었습니다. 신숙주의 아내가 이 일로 자살했다고 하나, 역시 사실이 아닙니다. 정통성 측면에서 보면 세조에게 문제는 있지만 신숙주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을 뿐, 누군가를 배반하고 뒷통수 친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격적으로 존경받을만한 사람이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와 같은 학자들이 아무런 학문적 성과를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린 반면 신숙주는 여러권의 저서를 남기고 세조가 나라를 다스리는데 큰 힘이 되어 국가 안정에도 크게 이바지한 사람입니다. 변절을 자주 했다는건 어디서 잘못 주워들은 소리고, 효성이 극진한 사람이었습니다." ....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 제사상 제수진설에도 말이 많다. 여북 해서 「남의 제사에 곶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참견 말라」는 말이 나왔으며. 「깎아 놓아라 굴러간다」는 풍자까지 생겼을 정도이다. 대한한사전(大漢韓辭典)에 조(棗)(대추조)를 찾아보면 「조동율서(棗東栗西)」라고 되어있으나 예문(禮文)에는 없는 말이다. 또 홍동백서(紅東白西)라 하나 이것도 찾아 볼 수 없다. 예문(禮文)에는 조서률차(棗西栗次)라 했을 뿐이다. 퇴계(退溪)는 「어동육서(魚東肉西)로 생동숙서(生東熟西)와 적유삼종(炙有三種)(어축치(魚縮雉))이며. 어육(魚肉)은 천산(天産)이라 양(陽)이니 기수(奇數)요. 과곡(果穀)은 지산(地産)이라 음(陰)이니 우수(偶數)라 약가빈난변(若家貧難辨) 칙의음양수(則依陰陽數)하여 멸품(滅品)도 미유불가(未有不可)」라 하였다. 치적(雉炙)은 계적(鷄炙)으로 대용한다. 또 사계(沙溪)는 「상례비요(喪禮備要)의 진설도(陳設圖)는 판본(板本)의 오야(誤也)」라 하였고 . 퇴계(退溪)는 묘사(墓祀)에는 진찬례(進饌禮)가 없으나 반갱(飯羹) 불용(不用)도 무방하다고 하였지만, 구봉(龜峰)은 원야례(原野禮)에도 반갱(飯羹)이 있으니 반갱(飯羹)을 아니 써서는 안되며, 종헌(終獻)때 계반개(啓飯蓋)하고 삽시(揷匙) 후에 부복하라고 하였다. 진설 요령은 집사자(執事者)의 좌(左)가 서(西)요 우(右)가 동(東)이다. 따라서 젯상의 앞이 남(南)이 되고 뒤가 북(北)이 된다. 남(南)에는 제상 앞 중앙에 향탁을 놓고, 그 동(東)편에 주준상(酒樽床), 서(西)편에 축(祝)탁을 놓는다. 향탁 위에는 후면 중앙에 모사를 놓고 그 뒷줄에 합동로서(盒東爐西)로 향합과 향로를 놓고. 주준상 위에는 강신잔반(降神盞盤), 퇴주그릇 주전자 술병을 놓고, 향탁 앞에 배석(拜席))이며 북면(北面) 중앙에 신위(神位)인데 고서비동(考西東)이다. 제상남단이 제오행(第五行)으로 실과인데, 생과(生果)가 서(西)편, 조과(造果)는 동(東)이며. 사행(四行)이 채(菜)(나물). 삼행(三行)이 탕(湯). 이행(二行)이 적(炙). 일행(一行)이 반갱(飯羹)이다. 사행(四行)양끝에 「좌포(左脯) 우혜(右醯), 이행(二行)양끝에는 「좌면(左麵) 우병(右餠), 일행(一行)에는 좌단(左端)으로부터 「시접(匙접) 반(飯) 잔(盞) 갱(羹) 초(醋)」가 되고, 합설시(合設時)에는 「반(飯) 잔(盞) 갱(羹) 시접(匙접) 반(飯) 잔(盞) 갱(羹)」이 된다. 혜(醯)는 젓갈. 적(炙)은 어적(魚炙) 육적(肉炙) 치적(雉炙)이 있는데 치적(雉炙)은 계적(鷄炙)으 로 대용한다. 그리고 탕(湯)은 어탕(魚湯), 육탕(肉湯), 채탕(菜湯))이 있는데 제수는 살림 형편과 그 때 그때 사정에 따를 것이지 수량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 제수의 가지 수 보다는 고인을 기리는 정성이 담겨 있어야 한다. 제사상 진설(陳設)법은 각 지방의 관습에 따라 다른 점이 많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향교에서 권하는 제사상 차리는 법을 많이 따르고 있습니다. 진설하는 위치를 말할 때는 편의상 제사 지내는 신위를 향하여 우편을 동쪽, 좌편을 서쪽으로 정합니다. 북쪽에 병풍을 치고 병풍 앞에 신위를 모실 위패(位牌)와 촛대를 마련한 다음 식어도 괜찮은 음식부터 제물을 차리고 진설이 다되면 사진 혹은 미리 써둔 지방을 위패에 붙입니다. 제사상 앞 가운데 위치한 향상에는 축문, 향로, 향합을 올려 놓으며 그 밑에 모사(茅沙)그릇, 퇴주그릇, 제주(술)등을 놓습니다. 진설하는 방법에서 기본이되는 몇 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반서갱동(飯西羹東) 밥은 서쪽(왼쪽) 국은 동쪽(오른쪽)에 위치 한다.즉 산 사람의 상 차림과 반대이다. 수저는 중앙에 놓는다. 적전중앙(炙奠中央) 적은 중앙에 위치한다. 적은 옛날에는 술을 올릴 때마다 즉석에서 구워 올리던 제수의 중심 음식이었으나 지금은 다른 제수와 마찬가지로 미리 구워 제상의 한가운데 놓는다. 좌포우혜(左脯右醯) 4열 좌측 끝에는 포(북어, 문어, 전복)를 놓고 우측 끝에는 젓갈을 놓는다. 어동육서(魚東肉西) 생선은 동쪽에 놓고 육류는 서쪽에 놓는다. 두동미서(頭東尾西) 생선의 머리는 동쪽을 향하게 하고 꼬리는 서쪽을 향하게 놓는다. 홍동백서(紅東白西) 과일 중에 붉은 색 과일은 동쪽에 놓고 흰색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 조율시이(棗栗枾梨) 조율시이라하여 좌측부터 대추, 밤, 감(곶감),배(사과)의 순서로 놓는다. 좌면우병(左麵右餠) 2열 좌측에 국수를 우측에 떡을 놓는다. 생동숙서(生東熟西) 4열 동쪽에 김치를 서쪽에 나물을 놓는다. 건좌습우(乾左濕右) 마른 것은 왼쪽에 젖은 것은 오른 쪽에 놓는다. 진설하는 열은 모두 5열로 하며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합니다. 제1열은 술잔과 메(밥), 떡국(설), 송편(추석)을 놓는 줄 앞에서 보아 떡국(송편)은 우측에 술잔은 좌측에 차린다. 시접(수저와 대접)은 단위제의 경우에 앞에서 보아 왼쪽에 올리며, 양위합제의 경우에는 중간 부분에 올린다. 제2열은 적(炙)과 전(煎)을 놓는 줄 대개는 3적으로 육적(육류 적), 어적(어패류 적), 소적(두부 채소류 적)의 순서로 올린다. 적 : 생선이나 고기를 대꼬챙이에 꿰어서 양념하여 구운 음식. 전 : 재료에 밀가루를 뭍혀서 후라이 팬에 부친 음식(부침개). 제3열은 탕을 놓는 줄 대개는 3탕으로 육탕(육류탕), 소탕(두부,채소류탕), 어탕(어패류탕)의 순으로 올리며, 5탕으로 할 때는 봉탕(닭,오리탕), 잡탕등을 더 올린다. 한가지 탕으로 하는 경우도 많이있다. 제4열은 포와 나물을 놓는 줄 좌측 끝에는 포(북어, 대구, 오징어포)를 쓰며 우측 끝에는 식혜나 수정과를 쓴다. 그 중간에 나물반찬은 콩나물, 숙주나물, 무나물 순으로 올리고 삼색나물이라하여 고사리, 도라지, 시금치나물등을 쓰기도 하며 김치와 청장(간장), 침채(동치미, 설명절)는 그다음에 올린다. 제5열은 과실을 놓는 줄 좌측부터 대추, 밤, 감(곶감), 배(사과)의 순서로 차리며 그 이외의 과일들은 정해진 순서가 따로 없으나 나무과일, 넝쿨과일 순으로 차린다. 과일 줄의 끝에는 과자(유과)류를 놓는다. 한분을 모실 때의 제사상 차림도 고인의 내외분을 함께 모실 때의 제사상 차림도 ⊙제수(祭羞) : 제수(祭需)) 제수(祭羞))라 함은 제사에 차리는 음식물을 말한다. 제사는 고인을 추모하기 위한 정성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정성의 표시는 물질로써 가름되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첫째 제수는 많은 돈을 들여서 성찬을 차리기보다는 평상시 망인(亡人)이 즐겨하는 음식 또는 가정에서 먹는 반상음식으로 깨끗하게 차려 정성을 다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번거로운 의식 절차로 행하는 것만이 의례로 여겼던 옛날의 성현 말씀에도 「맘을 다한 것이 제사의 근본이라 할 수 있고 물질로만 다한 것은 가장 잘못된 제사이다」고 하였다. 예문(禮文)에 「진기심자(盡其心者) 제지본(祭之本), 진기물자(盡其物者) 제지말(祭之末)」이라. 마음을 다하는 것이 제사의 근본이지 물질로만 때우려 드는 것은 잘못된 제사라고 하였다. 포(脯)는 주로 문어나 건어를 쓰고, 과실에는 밤, 대추, 배, 감, 은행 등을 쓰되 홀수여야 한다. 그리고 소채(燒菜)로는 두가지의 익힌 나물과 한 가지의 김치를 쓴다. 어물로는 주로 조기를 쓰며 육물(肉物)엔 집짐승의 고기를 쓰느게 좋다. 적(炙)으로는 육(肉)과 간(肝)을 이용하는데, 진찬(進饌)이라고 하여 간을 초헌 때 올리고 육은 아헌과 종헌 때에 올린다. 떡과 간장을 준비하고, 국은 육물, 생선, 채소 등으로 한다. 옛날엔 탕(湯)을 어(魚), 육(肉), 소(蔬) 등으로 3탕을 올렸으나 요즘은 단탕(單湯)으로 위의 재료를 혼합하여 쓴다. 설 차례는 메 대신 떡국을, 추석 차례는 메 대신 송편을 올립니다. 제사에 쓰지 않는 음식은 복숭아, 꽁치, 삼치, 칼치, 고추, 마늘 등이며 식혜, 탕, 면 등은 건데기만 사용합니다. 밥(반飯) 제삿밥으로 신위의 수대로 주발 식기에 수북이 담고 뚜껑을 덮는다. 예전에는 밥 외에도 국수를 올렸으나 오늘날에는 생략해도 무방하겠다. 국(갱羹) 제사 국이다. 신위의 수대로 대접 또는 주발을 담고 뚜껑을 덮는다. 재료는 쇠고기와 무를 네모로 납작하게 썰어서 함께 끓인다. 고춧가루, 마늘, 파 등을 쓰지 않는다. 떡(편) 제사에 쓰는 떡은 현란한 색깔을 피하므로 팥고물을 쓸 때는 껍질을 벗겨 내어 가급적이면 흰 빛깔이 되게 한다. 보통은 백설기나 시루떡을 해서 사각의 접시에 보기쫗게 놓고, 신위의 수에 관계없이 한 그릇만 올리기도 한다. 찌게(탕(湯) 탕은 오늘날의 찌개라고 할 수 있다. 쇠고기, 생선, 닭고기 중 한가지만을 택하여 조리한다. 양념에 파, 마늘, 고추등을 쓰지 않는다. 예전에는 탕의 수를 1,3,5의 홀수로 하였고 탕의 재료로서 고기,생선,닭 등을 사용하였다. 3탕일 경우는 육탕, 어탕, 계탕을 준비하였는데 모두 건더기만 탕기에 담았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국물과 같이 올리는 경우도 있으므로 편리한 대로한다. 튀김 및 부침(전煎) 기름에 튀기거나 부친 것으로 육전(肉煎)과 어전(魚煎) 두 종류를 준비한다. 옛날에는 적과 함께 계산하여 그릇 수를 홀수로 만들기 위해 전은 반드시 짝수로 만들었다. 전과 적을 합하여 홀수가 괴어야 하는 것은 재료가 고기,생선등 천산(天産)이기 때문에 양수인 홀수에 맞춘 것이다. 육전은 쇠고기를 잘게 썰거나 다져서 둥글게 만들어 계란을 묻혀 기름에 부친다.어전은 생선을 저며 계란에 무치고 기름에 부친다. 구이(적炙) 적은 구이로서 제수 중 특별식에 속한다. 옛날에는 육적(肉炙), 어적(魚炙), 계적(鷄炙)의 3적을 세 번의 술잔을 올릴 때 바꾸어 구워서 올렸으나 오늘날에는 한가지만 준비하도록 하고 올리는 것도 처음 진찬 때 함께하고 잔을 올릴 때마다 따로 하자 않는다. 육적(肉炙)은 쇠고기를 2~3등분하여 길게 썰어 소금구이하듯이 익혀 사각 접시에 담는다. 어적(魚炙)은 생선 2~3마리를 고춧가루를 쓰지 않고 익혀서 사각의 접시에 담는다. 이때 머리는 동쪽으로 하고 배는 신위 쪽으로 가게 담는다.(지방에 따라 반대대로 하기도 한다) 계적(鷄炙)은 닭의 머리, 다리, 내장을 제거하고 구운 것으로 등이 위로 가게 하여 사각의 접시에 담는다. 적을 올릴 때는 적염(炙鹽)이라 하여 찍어 먹을 소금을 접시나 종지에 담아 한 그릇만 준비한다. 나물(숙채熟菜) 익은 채소이다. 한 접시에 고사리, 도라지나 무, 배추나물 등 3색 나물을 곁들여 담는다. 또는 각기 한 접시씩 담기도 한다. 추석 때는 배추, 박, 오이, 호박도 푸른색 나물로 쓰는데 역시 마늘,고추가루는 양념으로 쓰지 않는다. 김치(침채沈菜) 희게 담은 나박김치를 보시기에 담아서 쓴다. 고춧가루를 쓰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간장(청장淸醬) 맑은 간장을 한 종기에 담는다. 과일류 전통적으로 제사에 쓰는 과일은 대추 밤 감, 배였으므로 이것들을 꼭 준비하고 그밖에 계절에 따라 사과, 수박, 참외, 석류, 귤 등의 과일을 1~2종 준비하면 충분하다. 바나나, 파인애플, 키위 등 생소한 수입 과일은 일체 사용하지 않도록 한다. 옛날에는 과일이 지산(地産)이라 하여 그릇 수를 음수인 짝수로 하였다. 포(脯) 고기를 말린 육포, 생선의 껍질을 벗겨서 말린 것, 문어나 마른 오징어 중에서 한두 종류를 사각의 접시에 한 그릇만 담는다. 옛날에는 문어다리나 오징어를 가위나 칼로 왕관, 산호, 공작깃의 형태로 오려서 장식하기도 했으나 오늘날에는 생략하기도 한다. ⊙제사(祭祀))의 유래 제사를 지내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먼 옛날 사람이 원시적인 생활을 할 때 천재 지변이나 또는 사나운 맹수등의 공격과 질병으 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한 수단으 로서 하늘과 땅 심수(深水), 거목(巨木), 높은 산. 바다. 조상 등에서 절차를 갖추어서 빌었던 것이니 이것이 즉 제사가 발생한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이 자연변화나 어떤 공격체나 또는 질병으 로부터 보호 받기 위한 수단으 로서 행하여져 온 제사는 중세와 근세에 이르러 차츰 유교적인 조상숭배의 제도로 변하여 졌으나. 그대신 유교적인 번잡한 절차와 자연숭배의 미신적인 의식이 높아지므로 가정마다 연간 제사를 지내는 횟수가 무려 48회 이상이나 되었다. 제례(祭禮)는 상례(喪禮)와 마찬가지로 그 의식절차(儀式節次)가 너무 복장하고 까다로워서 옛날부터 유학자(儒學者)나 예문가(禮文家) 사이에서 갑론을박의 논쟁이 많았을 정도였다. 우리나라의 제사는 고래부터 신명을 받들어 복을 빌고자 하는 의례로서 자연숭배의 제사 의식이 행하여 졌다. 삼국시대부터 자연신에 대한 제사가 자신의 조상에 대한 제사의례로 발전하였으며 일반 민중보다 왕가에서 먼저 행해졌다. 고려 말에 성리학의 수입과 더불어 주자가례에 따라 가묘를 설치하려는 운동이 사대부 사이에서 활발해 졌으나 사실상 가묘가 그다지 보급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불교의례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주자가례와 같은 유교의례가 사회전반에 쉽게 보급되지 않았다. 16세기 중엽부터 성리학이 심화 되면서 양반 사대부 사회에서 주자가례가 정착하게 되고 주자가례에서 명시된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면서 조상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표시로 행하여 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