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사회가 되려면 점유율이 몇 %가 되어야 하죠?
중세말의 경제위기: 농업위기 봉건사회의 위기
개요
<기본서 참조>
E. M. Burns, pp. 446-461; B. Tierney, pp. 535-550.
A. 개관
14,5세기에 이르러 중세적 사회질서와 문명은 동요하기에 이르렀다. 경제적으로 우선 中世盛期의 팽창이 정지 또는 수축되었다. 개간활동이 한계에 이르렀고, 농업생산성이 감퇴하였다. 이는 식량공급의 부족과 주민의 만성적인 영양부족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Pest와 같은 일련의 역병이 닥쳐와 심각한 인구의 손실이 야기되었다. 14 세기 중엽에 전 유럽을 석권한 역병으로 인하여 유럽의 인구는 약 1/3 또는 그 이상이 손실되었다. 농업과 토지경제의 수익으로 지탱되던 사회에서 농업생산기반의 동요는 사회질서의 교란을 초래하였다. 경제적 기반의 동요로 봉건귀족의 내부에는 격심한 계층분열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대제후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그러한 층으로 편입되는 귀족들과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상실하고, 몰락하는 군소귀족으로 양분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농민은 봉건적 예속이 이완되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신분적 지위를 획득했으나, 그들의 경제적 처지는 한결같지 않았다. 소수의 농민들은 富를 축적하여 성장하였지만, 농산물가격의 하락으로 중간규모의 토지를 보유한 다수의 농민이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도시의 상공업과 원거리무역도 이러한 일반적인 경기변동에 영향을 받았다. 이와 같은 경제적 위기는 사회갈등을 증폭하여 유럽의 농촌과 도시 여러 지역에서 허다한 인민봉기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 시기 유럽사회에서는 새로운 사회로의 지향을 위한 움직임도 진행되고 있었다. 농업과 상공업, 원거리 무역에서 서서히 경제력의 재배치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변동은 다음시기의 도약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B. 기본질문
1.
"위기(Crisis)"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위기'개념을 중세말의 사회변동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2.
소위 중세말의 경제위기를 자아낸 근본적인 요인은 무엇인가
3.
흑사병의 전파경로와 그 피해상황은
4.
흑사병의 창궐이 당시의 인간과 사회의 집단심리에 미친 영향은 그리고 인간의 대응방식은
5.
중세말에 정치, 경제, 사회의 각 영역에 이루어진 변동은 어떤 성질의 것이었나
1) 사회경제의 위기
A. 농업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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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전반기부터 15세기 후반까지 서유럽에는 끊임없는 재앙의 물결이 닥쳐왔다. 이 재앙의 토대에는 농업경제의 위기가 자리잡고 있었다. 1000년경부터 지속되었던 경제의 팽창국면이 수축기에 처한 것이었다. 중세성기에 이루어진 도시와 상업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중세유럽의 경제적 기반은 역시 절대적으로 농업이었다. 이와 같은 기본체질은 18,9세기까지 지속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농업생산체제의 변동은 사회 전반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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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경에 이르러 농업생산의 팽창은 그 한계에 이르렀다. 인구와 자연자원(토지)의 불균형이 표면화되었다. 말하자면 산업혁명기의 영국인 T. R. Malthus가 제기한 인구론을 연상케 하는 현상이 불거져 나왔다. 즉 기하급수적 인구증가와 산술급수적 식량생산증가 사이의 불균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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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성기의 농업팽창기에는 개간의 확대와 더불어 꾸준한 인구증가가 진행되었다. 증가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인간은 수익성이 나쁜 한계지(marginal land)까지 경작지로 변모시켰다. 14세기초에 이르러 별다른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회에서 농업생산은 한계에 봉착했다. 소출은 떨어지고, 인구는 과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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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늘날의 연구에 의하면 14세기에는 기상이변도 전개되었다. 기후가 한랭하고 습도가 높아졌다. Greenland가 빙하로 뒤덮인 것도 이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우량도 증가했다. 마침내 1315-17에 유럽 각지에 천재지변과 함께 대흉작이 닥쳐왔다. 광범한 지역에 대기근이 닥쳐왔다. 비위생적인 환경과 불충분한 영양공급으로 이미 허약해져 있던 중세인에게 이와 같은 급작한 환경변경은 많은 인구의 손실을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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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경제사가 Wilhelm Abel은 이와 같은 일련의 농업불황을 근대경제학의 이론모델로 설명한 고전적인 견해를 안출했다. 즉 인구변동으로 인한 농산물의 가격변동에 주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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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전반기의 재난과 특히 중엽의 흑사병으로 인하여 인구가 급감한데 비하여 농산물의 생산은 일정기간 비탄력적으로 반응, 그리하여 농산물의 공급과잉으로 인한 가격폭락이 초래되었다. 이와 같은 경기운동(Konjunktur)은 15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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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지에서의 곡물경작이 포기되고, 심지어 여러 개의 촌락과 그 경작지가 放棄되는 사태까지 전개되었다.→ 廢村(Wüstungen), 농촌황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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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는 大領主, 중규모 이상의 토지를 보유한 대농민 - 농산물, 특히 곡물의 공급자 - 이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는 한편, 인구감소로 인하여 노동력이 희소해져 단순노동자의 처지가 유리해 지는 국면이었다. 희소해진 농업노동력을 유인하기 위해 영주들은 地代(rent)를 引下하고, 임금은 상대적으로 상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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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경영자, 토지소유자들이 곤경에 처한 반면 도시의 수공업자, 匠人들은 임금과 공산품의 상승으로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Das goldene Zeitalter des Handwe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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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중엽부터 경기변동의 역전이 이루어 졌다. 인구가 최하강국면에서 다시 급작히 증대하는 데 비하여 역시 비탄력적인 농업생산의 대응으로 15,6세기에 농산물가격이 급등하는 역전현상이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 소위 가격혁명, 여기에서는 이 시기 신대륙에서 유입한 다량의 귀금속도 작용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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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아벨은 중세말기 약 2-300년간의 경제변동을 거대한 경기변동의 사이클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아벨의 위기설은 농업부문에서의 변동을 중심으로 非農業部門에서의 사태전개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설명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편 농업부문에서도 그의 연구는 충분하게 광범히 수집된 사례에 근거하기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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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後學들은 도시경제와 수공업부문에서도 경기침체현상을 확인했다. 아직도 중세말의 경제변동, 특히 위기상황은 충분히 설명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나아가 "과연 위기가 있었는가 "라는 의문조차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B. 흑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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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에 등장했던 질병은 오늘날 그 실체를 분명하게 구명하기 어렵다. 우선 믿을만한 증거가 부족하고, 대개 의학지식이 부족한 당대인의 불분명한 진술에 의존해야 하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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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연대기에는 대규모의 역병, 전염병이 pestilentia라는 지칭아래 막연히 포괄되고 있는데, 오늘날의 의학지식에 의하면 대개 여러 가지 질병이 혼입되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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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중엽부터 전 유럽에 창궐했던 페스트는 주종이 腺페스트, 肺페스트로 알려지고 있다. 이 질환은 쥐벼룩을 중간숙주로 하여 전파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공기를 통해서 직접 호흡기로 감염될 수도 있었으며 대개의 경우 감염되면 환자가 수일내에 사망하는 치명적인 질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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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경 고대 비잔틴세계에서도 출몰한 바 있었던 페스트는 중앙아시아 흑해연안지방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시기 유럽에는 지중해무역선을 통해 남부에서 북부로 대단히 짧은 기간에 확산되었다. 1347-50 사이에 그 전파경로는 대략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지도 참조): 1333, 중국 -> 1347 가을, Byzantine →1347 Sept, Sicily, Messina → 1348, England, Spain → 1349-50, Eastern Europe, Iceland, Green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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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일부의 지역 - 중부독일의 Franken지방, 보헤미아, 폴란드 등 - 은 흑사병의 영향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흑사병은 이후 약 100여년의 주기로 계속 유럽을 괴롭혔다. 최후의 대대적인 흑사병의 내습은 1720/1년의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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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은 그 자체로서도 치명적이었겠지만 이미 농업체제의 구조적 파탄으로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려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했던 중세인에게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였다.
2) 사회와 경제의 변동
A. 흑사병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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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의 직접적인 피해는 우선 인구감소였다. 물론 인구감소는 흑사병이전부터 시작한 것으로, 흑사병은 이런 사태의 전개를 더욱 악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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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인구는 1000년경 대략 3800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흑사병이 엄습하기 직전 1350년경에는 대략 7500만으로 추정된다.(300년 사이에 2 배의 증가!) 이 숫자가 흑사병의 시기를 거치면서 4-5000만으로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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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적인 사례를 열거해 보자. Toulouse: 30,000(1335) → 26,000 (1385) → 8,000 (1430); 동부 노르망디: 1347→ 1357 (30% 감소) -→ 1380 (다시 30%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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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의 창궐은 경제의 마비와 교란을 초래하였다.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도시를 탈출하고 생산이 放棄되어 물자의 공급이 두절되고 가격이 폭등과 폭락을 거듭했다. → 개별지역 사례에 의거한 미세한 연구가 필요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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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중요한 것은 흑사병이 당대인의 의식과 태도에 미친 영향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의학지식이 결여된 당대인에게 흑사병은 죄악에 물든 인간세계를 벌하는 "신의 분노(ira dei)"와 같은 일대 재앙으로 여겨졌다. 교회는 사실상 그렇게 가르쳤다. 그러나 교회도 사제도 흑사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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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반응은 극단적인 양상을 띠었다. 한편 종교적 대응양식이 극도로 고양되어 참회와 고행의 행렬이 나타나는가 하면, 현세도피적이고 찰나적인 쾌락에 탐닉하였다(Boccaccio의 Decameron을 상기하라). 또는 누군가에 이 재앙의 책임을 돌려 속죄양으로 삼았는데 유태인이 그 피해자로서 대량의 수난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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鞭打苦行者, 채찍질 고행자(Flagellants): 흑사병이 창궐할 무렵 14세기 중엽, 일련의 속인들이 행렬을 지어 전 유럽을 배회하였다. 이들은 헐벗은 스스로와 이웃의 동료를 채찍으로 때리면서 회개를 외치고 신의 자비를 구걸하는 행렬을 벌였다. 일종의 집단 히스테리현상이 광신적 으로 발동된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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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 탄압: 1 차 십자군원정이 개시되었을 때, 성지탈환의 미명으로 狂信的인 무리가 북프랑스와 라인지방의 유태인 공동체를 滅殺한 사례가 있었다. 흑사병이 유행할 때, 사람들 사이에는 유태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든지, 기독교도의 어린아이를 유대교의 비밀의식에 犧牲으로 했다든지 하는 근거없는 소문이 퍼지면서, 도처에 유태인이 집단으로 학살되고, 재산이 몰수되는 수난을 받았다. -→ 이 역시 하나의 집단 히스테리 현상.
B. 농촌과 농업구조의 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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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이르러 경제주체들의 완만한 적응이 이루어졌다. 단순생필품, 특히 곡가가 폭락함으로써, 영주나 농민들은 다른 대안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농업의 전문화가 등장. 즉 축산, 목양, 과수재배, 포도재배, 염료작물재배와 같은 상업적 농업의 경향이 나타나고, 이런 경향의 발달이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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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양모생산, 프랑스의 포도재배, 북구의 낙농업 등이 이런 발전의 결과였다. 한편 이와 같은 농업생산의 전문화, 상업화는 여러 지역간의 교역을 촉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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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Elbe강 이동에서는 곡물을 위주로 한 농업생산의 전문화가 전개되었다. 특히 1450-1600 사이 경과하는 기간에 이 지역의 곡물생산이 西歐의 시장에 대량으로 수출할 수 있는 판로를 발견하게 되면서 이러한 발전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한편 원래 이 지역은 중세성기의 동방식민운동(Ostkolonisation) 과정에서 대대적으로 개발된 곳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의 농민들은 출발부터 저렴한 지대납부의무와 자유로운 신분적 지위를 향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세말의 위기국면을 거치면서 이 이에 따라 東歐의 영주들은 농민들에게 이주의 자유를 박탈하여 이들을 토지에 묶어놓으면서, 영주직영지에서의 무제한적인 부역노동을 강요하였다. 영주들은 자가소비가 아니라, 외부의 시장에 수출을 목적으로 농민의 부역노동으로 대량의 곡물을 생산했다. 이렇게 형성된 독특한 농업구조를 農場領主制(Gutsherrschaft)라고 하는데, 이는 19세기 중엽, 나아가 20세기초까지 지속되면서 동부유럽의 사회발전을 저해했다.
C. 도시경제와 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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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경제는 원래의 생산체제가 탄력적이므로 흑사병을 비롯한 이 시기의 경제변동에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도시의 제조업은 가격의 변동에 직면하여 생산량을 조절하여 대응하였고, 임금의 상승으로 인한 고비용을 농촌의 노동력을 유인하여 해소하려고 했다. 이러한 사정에서 도시의 인구는 비교적 신속히 회복되었다. (물론 이는 적어도 5-60년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 중세도시는 자체적인 인구증식능력이 허약했다. 이들은 인구의 적정수준을 유지하게 위해 항상 외부로부터의 유입을 필요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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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는 프롤레타리아층이 증대하기도 했지만, 한편 일부 상인들이 대량의 富를 축적함으로써, 소위 초기자본주의적 요소를 띤 경제활동도 등장하였다. 교역패턴에 변화가 나타났는데, 특히 북독일의 도시동맹, 남부독일의 도시동맹,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가 그 중심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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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국에서는 단순한 양모수출의 단계를 넘어서 직물을 생산·수출하게 되었다. 12세기경부터 영국은 플랑드르의 여러 도시에 양모 - 직물의 원료 -를 수출하였다. 그러나 14세기부터 백년전쟁으로 인하여 대량의 양모수출이 여의롭지 않게 되자 직접 직물가공으로 전환하였다. 물방아를 동력원으로 하는 일련의 기술혁신과 발맞추어 영국의 양모산업은 번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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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독일, 북해와 발트해 연안의 독일인 도시들은 13세기의 경제적 공동체수준을 넘어 14세기에는 강력한 정치적 연맹체로 발전하였다. 즉 한자동맹(Hanseatic League, E. Hanse, G, F.)이었다. 1370년 뤼벡(Lübeck)시를 중심으로 한 한자동맹은 덴마크왕을 무력으로 누르고 발트해의 무역을 독점하였다. 한자도시들은 러시아의 노브고로드(Novgorod)에서 영국의 런던에 이르기까지 Kontor라고 하는 商館을 설치하고 북방의 무역을 장악했다. 이들은 북해산의 청어, 북독일내륙의 소금(대표적으로 Lüneburg시), 러시아, 동구의 목재, 곡물을 서유럽 도처에 공급하여 막대한 무역이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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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남부독일에서는 아우그스부르크(Augsburg), 울름(Ulm), 뉘른베르크(Nürnberg)등의 도시를 중심으로 이태리와 북유럽의 무역로를 장악하여 富를 축적하는 대상인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또한 생산도 조직하여 직조, 광업, 제련업까지 손을 뻗쳤다. Fugger가를 비롯한 대상인들이 이런 배경에서 성장하였다. → 이탈리아의 Medici家門을 포함하여 이들은 이전 시기의 상인과 달리 생산과정에 깊이 개입했다. 원료를 집적하여 주변의 農家에 加功을 위탁하고, 다시 完製品을 수거하여 원거리 시장에 판매하는 이른바 先貸制(putting out system)의 주역이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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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대상인들은 북부와 중부의 도시 -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등 - 들도 여전히 상업으로 번성했다.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전통적으로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고급의 직물생산을 전문으로 생산하였다. 이들이 축적한 부로 말미암아 주변의 농촌도 더불어 혜택을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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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상인들은 15세기부터 복식부기(Lucas Paccioloa라는 사람이 처음 고안했다고 전해진다.)를 이용하는 영업기법을 발전시켰고, 피렌체의 메디체가문은 전유럽의 주요도시에 支店을 두는 금융제국을 건설했다. 남부유럽의 Fugger家역시 이러한 발전에 동참하였다. 이들 은행가의 활동으로 환어음 또는 수표와 같은 대금결제방식이 고안, 실행되어 硬貨의 부족을 보충하여 유럽의 교역을 활발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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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의 무역로와 무역중심지에도 변동이 있었다. Champagne의 대시장에 대해 프랑스왕의 과도한 관세를 요구하자 상인들이 이 대시장(Fair)을 회피하여 다른 지역에 거래의 중심지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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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농업위기, 흑사병으로 점철된 유럽의 경제는 이와 같이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침체와 파탄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경제력 배치가 재편성되면서, 새로운 중심지와 동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3) 사회질서의 동요
A. 農民蜂起 (peasant revo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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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부터 1500년 사이의 유럽사회는 격동과 변화의 시기였다. 경제양식의 변화는 사회질서의 동요를 가져왔다. 새로이 경제적 균형을 모색하는 이 시기에 사회갈등은 극도로 증폭하였다. 농촌과 도시 도처에서 인민들의 폭동과 봉기가 일어났다. 이 시기의 유럽사회 도처에 일어난 소요사태는 이전 시기의 어느 때보다 빈발했고, 규모도 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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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흑사병이 창궐하는 시기에 사람들은 인간의 무력함을 절감하면서, 재난에 아무런 대책을 강구하지 못한 체제교회에 대하여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도 사람들의 心性은 어느 면에서는 더욱 종교적이 되었다. 이들은 요컨대 기존의 봉건사회질서와 맞물려있는 체제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종교적 감화를 갈구하게 된 것이다. → 예; Flagell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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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욕구는 당대의 개혁사상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체제교회에 의해 異端으로 낙인찍힌 이들의 개혁사상은 종종 농민이나 도시하층민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여, 이 시기의 하층민 봉기에 강력한 정신적 동기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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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객관적으로 농민이나 도시 노동자들의 처지가 항상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인구감소라는 상황에서 이들의 노동력은 오히려 희소가치를 지니게 되었고, 토지와 인신에 대한 권리도 성장했다. 봉건지배층은 자신들이 봉착한 곤경과 위기를 농민과 도시의 하층민에게 전가하는 방법으로 타개하려고 했다. 예를 들면 1351년 영국의 의회(parliament)는 노동조례(Statute of Labourers)와 같은 법령으로 임금을 통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치가 현실적으로 효과를 발생하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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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ienne Marcel의 봉기(1357)와 자크리(Jacquerie)봉기(1358): 프랑스에서는 백년전쟁으로 인한 피해, 그리고 전쟁수행의 부담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도시주민과 농민의 봉기가 중첩적으로 발생했다. 파리의 상인 마르셀( Marcel)이 왕정의 重稅賦課와 왕세자(Dauphin)측근의 무능에 분개하여 봉기했다. 이 봉기는 곧 주변의 농촌에서 농민의 봉기를 유발했다. 우선 파리북방 보베(Beauvais)에서 이어 주변의 여러 지역에 파급되었다. 이 봉기는 나중의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도시주민과 농민의 봉기에서 그러하듯이 각각의 다른 이해관계때문에 통일된 역량으로 결집되지 못하고 각개격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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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1년 영국의 와트 타일러(Wat Tylor)봉기: 이 봉기는 프랑스의 농민봉기와 달리 성장한 농민의 기대와 역량에서 폭발했다. 흑사병의 영향으로 영국의 농민들은 오히려 그 처지가 개선되어가고 있었다. 신분적 예속이 완화되고, 농업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하고, 농민의 地代가 하락되었다. 이러한 추세에 대하여 귀족영주들은 경제적 수익의 감소를 막기위해 강제적인 수단으로 농민의 신분적 예속과 지대의무를 강화하려 했다. 마침내 영국왕정은 농민에 대한 인두세수취를 강제하자 이에 대한 불만으로 반란이 발발. 봉기농민은 한 때 런던시까지 진출했으나 왕정의 지연술에 지도자를 읽고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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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봉기는 예시한 사례로만 그치지 않았다. 하나의 물결과 같이 스페인에도 플랑드르 지방에도 유럽전역에 파급되었다. 농민봉기는 자주 인근 도시주민의 봉기와 합류하기도 하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경제적 요구만이 아니라 정치적, 종교적 요구까지 포함하는 보다 큰 사회개혁의 요구를 제기하였다.
B. 도시의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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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도 수많은 반란과 폭동, 소요가 있었다. 1374년 Braunschweig시에서는 정치적인 파당의 싸움으로 시장이 살해당하는 사태도 발생했고(이 반란은 계급갈등의 한 양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1408년 한자도시 뤼벡에서는 납세자의 봉기라는 소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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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사회갈등의 전형을 보여주는 봉기는 1378년 피렌체에서 일어난 치옴피(Ciompi)의 난이었다. 이들은 직물생산과정에 종사하는 하층의 노동자들로서, 경제적인 곤궁과 도시문벌(patricians)의 부당한 경제조치에 항거하여 봉기하였다. 한 때 시정을 장악할 정도로 거센 힘이었으나, 결국에는 온전한 사회변동을 이루는데는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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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놀라운 사례: 1347년 로마에서는 Cola di Rienzo의 지도 아래 일종의 혁명과도 같은 변혁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는 로마교황청이 프랑스의 Avignon에 소재했었다. Cola di Rienzo는 로마의 公證人으로서 어느 정도의 지식과 교육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교황의 사절로서 활동하면서, 교황 不在時에 로마시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귀족들에 대항하여 한 때 로마시를 독재자같이 다스렸다. 그의 支持勢力은 로마시의 중산계층이었다. '고대로마의 영광을 부활시키자'는 메시지로 로마이외의 대도시까지 자신의 혁명에 규합하려던 그의 시도는 좌절되고 9개월에 걸친 그의 집정은 종말을 고했다. "고대로마의 부활"이라는 호소에는 이탈리아의 모든 정치세력 및 정치체 - 도시국가, 나폴리왕국, 군소의 公國 - 를 규합하여 고대 로마 공화국의 이념에 입각하여 모든 이탈리아 인의 이익을 구현하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성한다는 일종의 역사적 사명의식이 담겨있었다. 이는 중세유럽에 특유한 정치적 종교심의 유산으로서 그 이후 유럽의 모든 혁명적 운동에 공유되고 있는 유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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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말의 민중봉기는 개별적으로 상이한 동기와 목적에서 발생했다. 그 규모와 영향력도 상이하였다. 대개의 경우 민중봉기는 역시 기존의 지배층에 의해 진압되었다. 민중봉기는 중세적 질서의 동요를 웅변적으로 증거하는 사건이었으며, 또한 그 질서의 동요에 기여를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민중봉기는 그 나름대로 '실패한 파업'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태를 거치면서 농민과 도시하층민에 대한 신분적 예속, 法的 不自由는 지속적으로 완화되어 갔다. 특히 농촌에서의 그 두드러진 본보기는 이미 중세성기에서부터 진행된 경영변동, 즉 농민부역에 의한 귀족영주의 自家經營을 포기하는 경향이 더욱 진전된 것이었다.
C. 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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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은 대토지소유층으로서 곡가변동, 지대인하로 경제적으로 불안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한편 성장하는 대상인이나 금융업자로부터 자신들의 지배적 위치가 도전을 받는다는 위협도 느꼈다. 변화하는 경제와 사회질서에 적응하지 못하여 몰락하는 귀족도 나타났으며, 일부의 귀족들은 왕권에 기댐으로써, 또는 新興富者들과 결탁함으로써 - 특히 婚姻과 같은 수단 - 불리해진 처지를 만회하려고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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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시기에 고전적인 봉건적 가신관계(feudal vassalage)에 근본적인 변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경향은 물론 오래 전부터 예비된 것이었다. 封臣(vassal) 들이 토지보유의 대가로 主君(lord)에게 군사적 봉사를 제공하는 대신에 화폐를 대납하는 관행이 등장하게 되었다. 상급의 領主, 諸侯, 國王도 이와 같은 방식의 의무부담을 選好하게 되었다. 봉신들이 납부하는 화폐 - 이를 scutage라고 하는데 흔히 防牌稅라고 번역한다. - 로 유력제후들은 傭兵이나 기타의 정치적 공작에 필요한 下手人을 고용하였다. 나아가 봉급(salary)을 지불하고 필요한 要員을 고용하는 방식도 횡행하게 되었다. 몰락한 하급귀족은 이러한 관계에서 생존의 방도를 찾기도 했으며, 비귀족출신의 능력있는 젊은이들도 이러한 경로를 통해 유력자에 접근하여 정치적인 출세의 길을 찾았다. 고전적인 봉건제도의 擬制만 남은 이러한 보호 - 피보호 관계는 18세기까지 관행되었는데(영화나 소설로 잘 알려진 '3총사'의 주인공들을 연상하라!) 역사가들은 bastard feudalism (庶出 封建制)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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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은 영지경영의 개선을 통해 위기에 대처하기도 했다. 이 경우에는 적지 않이 농민의 희생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즉 귀족들은 농민에 대한 부담을 가중하거나, 성장한 농민의 권리를 삭감함으로써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는 수법을 취하게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 영국의 Enclosure(물론 16세기에 더욱 두드러졌지만...), 각지에서 전개되는 농민의 共同用益權(Allmenderecht)의 박탈, 賦役勞動의 강화 등등. 이러한 영주들의 책동을 포괄하여 봉건반동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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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적지 않은 수의 新興富者들 - 대개의 경우 대상인들 - 은 몰락한 귀족의 영지를 구입하고, 대제후 또는 王權의 특수한 비호를 받아 귀족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Medici나 Fugger家가 결국에는 상인으로 출발하여 貴族이 된 사실을 상기하라. 물론 이러한 경향은 16,7세기까지 끊임없이 지속되는 사회이동의 한 양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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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은 이와 같은 부유한 平民들의 신분상승에 제동을 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어느 면에서 유럽사회에서 '身分制'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집단 사이의 배타적인 법률적 장벽 세우기는 중세말기에 더욱 심해졌다. 騎士가 되기 위해 4 人 또는 8 人의 조상이 기사였다는 신분증명을 요구하기도 하고, Tournament에 참가하는 자격을 역시 같은 수법으로 제한하기도 하는 등, 자신들의 배타적인 특권을 보호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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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귀족들의 욕구에서 시대착오적인 십자군원정을 위한 기사단을 결성한다든지 - Bourgogne공이 결성한 黃金羊毛騎士團(Order of Golden Fleece) - 신분적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비정상적인 사치와 과장된 허장성세가 나타났다. → Duc de Berry의 월력에 묘사된 귀족의 생활상을 상기하라. <참고: 호이징가, 중세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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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시대에 의미심장한 움직임은 왕권의 강화였다. 귀족들이 단독으로 예전과 같이 독립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이들의 왕권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왕권 역시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왕권의 주도아래 중앙집권적 국민국가가 형성되는 하나의 계기가 여기 있었다.